[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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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reo 작성일25-05-09 08:29 조회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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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4] 사애리시와 공주제일교회8일 오전 충남 공주시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변신한 공주제일교회의 옛 예배당 전경. 충남 지역 개신교 역사를 간직한 이곳엔 연간 2만여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 /신현종 기자충남 공주 구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영명중·고교 뒷산 오솔길엔 한 소녀와 부부의 모습을 새긴 동상이 서 있다. 소녀는 유관순, 부부는 감리교 선교사인 로버트 샤프(1872~1906)·앨리스 샤프(1871~1972) 선교사이다. ‘천안이 고향인 유관순 열사 동상이 왜 공주에?’라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유관순은 1916년 서울 이화학당으로 가기 전 2년간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했다. 충남 목천 지령리교회에 출석하던 소녀 유관순을 수양딸 삼아 공주로 데려와 자신이 세운 영명학교에서 공부시키고 장학생으로 추천해 이화학당에 편입시킨 ‘멘토’가 앨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다. 유관순 열사가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을 키운 못자리가 공주제일교회와 영명학교였던 셈이다. 이들의 인연을 담은 동상은 2019년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세워졌다.8일 오후 충남 공주 영명고등학교 뒷길 언덕에 세워진 유관순(왼쪽) 열사와 로버트 샤프·사애리시 샤프 선교사 부부 동상. /신현종 기자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각각 파송돼 한국에서 만난 로버트와 앨리스는 1903년 이화학당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새로 문을 연 공주의 감리교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돼 1904년 부임한다. 공주는 당시 충청도 관찰사(도지사)가 있던 곳으로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이라는 지리적 요충이었기 때문에 1903년 선교부가 설치됐던 것. 공주제일교회는 1년 전인 1902년 설립됐다. 샤프 선교사 부부는 공주 시내가 굽어보이는 언덕에 서양식 벽돌집을 짓는 한편 ‘명선학교’(영명학교의 전신)를 세워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주 사람들은 ‘서양식 집 구경’ ‘서양 사람 구경’ 하러 몰려왔고, 사애리시는 신문물인 풍금을 연주하며 구경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고 한다. 신혼의 행복은 짧았다. 1906년 논산 지역을 순회 전도하던 로버트가 발진티푸스로 순직한 것.'충남 믿음의 어머니'로 불린 사애리시 선교사. /조선DB남편 사별 후 미국으[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4] 사애리시와 공주제일교회8일 오전 충남 공주시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변신한 공주제일교회의 옛 예배당 전경. 충남 지역 개신교 역사를 간직한 이곳엔 연간 2만여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 /신현종 기자충남 공주 구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영명중·고교 뒷산 오솔길엔 한 소녀와 부부의 모습을 새긴 동상이 서 있다. 소녀는 유관순, 부부는 감리교 선교사인 로버트 샤프(1872~1906)·앨리스 샤프(1871~1972) 선교사이다. ‘천안이 고향인 유관순 열사 동상이 왜 공주에?’라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유관순은 1916년 서울 이화학당으로 가기 전 2년간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했다. 충남 목천 지령리교회에 출석하던 소녀 유관순을 수양딸 삼아 공주로 데려와 자신이 세운 영명학교에서 공부시키고 장학생으로 추천해 이화학당에 편입시킨 ‘멘토’가 앨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다. 유관순 열사가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을 키운 못자리가 공주제일교회와 영명학교였던 셈이다. 이들의 인연을 담은 동상은 2019년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세워졌다.8일 오후 충남 공주 영명고등학교 뒷길 언덕에 세워진 유관순(왼쪽) 열사와 로버트 샤프·사애리시 샤프 선교사 부부 동상. /신현종 기자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각각 파송돼 한국에서 만난 로버트와 앨리스는 1903년 이화학당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새로 문을 연 공주의 감리교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돼 1904년 부임한다. 공주는 당시 충청도 관찰사(도지사)가 있던 곳으로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이라는 지리적 요충이었기 때문에 1903년 선교부가 설치됐던 것. 공주제일교회는 1년 전인 1902년 설립됐다. 샤프 선교사 부부는 공주 시내가 굽어보이는 언덕에 서양식 벽돌집을 짓는 한편 ‘명선학교’(영명학교의 전신)를 세워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주 사람들은 ‘서양식 집 구경’ ‘서양 사람 구경’ 하러 몰려왔고, 사애리시는 신문물인 풍금을 연주하며 구경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고 한다. 신혼의 행복은 짧았다. 1906년 논산 지역을 순회 전도하던 로버트가 발진티푸스로 순직한 것.'충남 믿음의 어머니'로 불린 사애리시 선교사. /조선DB남편 사별 후 미국으로 돌아갔던 사애리시는 2년 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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